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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홀리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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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령 2020. 4. 6.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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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ie HOliday(1915.4.7)미국


 개요

 

독특한 스타일의 천재 미국 흑인 재즈 가수

미국의 재즈 여가수. 본명은 엘리노라 고프 해리스(Eleanora Gough Harris). 세라 본,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재즈 3대 보컬리스트로 종종 거론된다. 1915년 미국 볼티모어[2]에서 태어나, 1959년 마약중독으로 사망했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기에 어머니인 세디 페이건의 성을 따라 '엘리너 페이건'이라 불렸다.

 

빌리 홀리데이(영어: Billie Holiday, 1915년 4월 7일 ~ 1959년 7월 17일)는 미국의 재즈가수이자 작곡가이다.

 

 

음악적 동료인 레스터 영이 지어준 'Lady Day'라는 별명을 갖고있으며, 재즈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보컬로 평가받는다.

억양과 템포를 조절하는 새로운 보컬 형식을 창조하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을 노래에 이입하여 진심어린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평론가 존 부시는 "미국의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라고 평하였다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16, 어머니는 13세였다. 어머니는 슬럼가 거리의 창녀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어린 나이에 창부의 삶을 살았다.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어머니는 키울 능력이 없어 빌리를 사촌의 집에서 맡겨졌으나 그곳에서 학대받으며 자랐으며, 1929년 클럽에서 인정받는 가수가 되기전까지 2번의 성폭행과 감옥생활을 겪었다.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그녀가 처음 성폭행을 당했을때, 상대는 40대의 백인이었고 그녀는 10살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백인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흑인인 그녀를 불량소녀로 몰아서 감호소에 집어넣었다.[3] 감호소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풀려나온 그녀는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다른 흑인 남자에게 또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결국 살던 곳에서 나온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의 할렘 가로 갔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창부의 일뿐이었다. 15살까지 할렘가에서 창부로 일하던 그녀는 성행위를 강요하던 흑인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매춘행위로 고발되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 창부의 생활을 접은 채 백인의 집에서 하녀생활을 하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곧 찾아온 미국의 대공황 속에서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 결국 방세를 갚지 못해서 길거리에 내쫓길뻔한 그녀는 거리의 포즈와 제리즈라는 나이트클럽의 댄서 오디션을 보러 갔지만, 춤을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 그녀는 오디션에 붙지 못했다. 그걸 가엾게 여긴 클럽의 피아니스트가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고 했고, 빌리 홀리데이는 노래를 시작했다.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그 광경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뒤늦게 그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만약 누가 핀이라도 하나 떨어뜨렸다면 그것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소리 같았을 것이다."

 

그때 얻은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좋아했던 배우 빌리 도브의 빌리와 아버지인 클래런스 홀리데이의 성 홀리데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녀의 아버지 클라렌스 홀리데이는 당시 빅밴드 플레처 핸더슨악단의 벤조 연주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처음엔 빌리 홀리데이를 자신의 딸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명성을 얻고 돈을 벌기 시작하자 아버지임을 자처하며 돈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 처참한 인생의 역경속에서 뉴욕의 클럽에서 그 노래를 인정 받기 시작했으며, 1933년 당시 스윙의 왕이라 불리던 베니 굿맨, 평론가였던 존 해먼드와의 만남으로 18세의 나이에 음반을 내고 본격적으로 재즈 가수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팬들이 그녀의 음색에서 가장 먼저 얻을 수 있는 것은 말기 감성을 쥐어짜는 그녀의 우울한 감성이지만, 초기에는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와 같은 스윙밴드의 보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런 그녀의 음악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은, 역시 1939년 폐렴에 걸렸음에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병원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부른 기이한 열매(이상한 열매, Strange fruit)# 영상 # 영상2 # 가사 잔인하게 살해된 흑인들의 사진이 가사와 함께 실려 있으니 주의바람 다. 루이스 앨런의 시에 노래를 붙인 이 곡은, 흑인들이 백인에게 폭력을 당한 다음 나무 위에 목이 매달려 있는 풍경을 묘사한 곡이다.[4] 그 이후 이 노래는 여성 작가인 릴리언 스미스에 의해 소설로 발표, 1944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으며, 빌리 역시 이 곡으로 1944년 에스콰이어 재즈보컬상을 수상한다. 이시기 마약하던 시절의 맬컴 엑스와 친했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활동에도 그녀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1941년 첫 번째 남편인 제임스 먼로와 결혼했지만 심한 마약 중독자라서 이혼했으나 오히려 그녀가 마약 중독자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남편인 존 래비는 사랑보다는 그녀의 돈만을 갈취하는 쓰레기라서 이혼하고 만다. 세 번째 남편 역시 마약과 무기혐의 소지 때문에 여러 번 옥살이를 거듭한 범죄자로 홀리데이를 괴롭혔던 나머지 견디지 못해 이혼했다. 그 외에도 그녀는 베니 굿맨, 오슨 웰스 등과 연애를 했지만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일생 가운데 제대로 된 사랑을 단 한번도 하지 못한 불행으로 가득찬 삶을 산 여자였다.

 

재즈 가수로서 성공은 했지만 인종 차별이 워낙 극심했던 시절이라 알게 모르게 차별을 많이 당했으며[5] 극심한 알코올과 마약 중독 때문에 가난에 시달렸고 나중엔 듀크 엘링턴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약값을 빌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보다못한 마일스는 마약 중독 치료까지 권할 정도였다.

 

1950년에 들어서는 그녀의 이러한 마약과 알코올 중독이 그녀의 삶을 완전히 갉아먹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 이후 금단과 중독을 계속해서 왔다갔다 하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삶의 마지막까지 녹음을 했으며 19595월 맨해튼 작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러진 이후 10주간 입원해 있다가 44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마약와 알코올로 인해 어찌나 몸이 망가졌는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무도 그녀의 외모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진료 기록에도 병명 : 마약 중독 말기, 치료 방법 없음이라고 써질 정도였다.

 

게다가 마약중독 이후로 그녀의 목소리는 천천히 망가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수많은 팬들 가운데는 마약에 중독돼서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오히려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층 더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로 느껴지게 된 것.

 

이처럼 흑인으로 태어나 사창가를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고 남편들도 전부 막장이였으며 말년엔 약물중독으로 고생했기에 평생을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햇다. 그래서 그녀의 지인들은 그녀의 장례식때 슬퍼하며 빌리는 죽었을 때야 진짜 행복해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근데 역설적으로 별명은 "Lady day". 그 별명은 보잘 것 없는 신분이지만 언제나 머리에 하얀 치자꽃을 꽂고 정갈하고 품위있게 노래를 하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별명이 되어 그렇게 우리에게 남아있다.

 

 

3. 음악 성향[편집]

 

 

초기 그녀의 음색은 팬들이 기억하는 말년, 즉 그녀가 삶을 마감하면서 부른 음반 Lady in Satin에 비하면 감성을 극으로 쥐어짜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회색빛이 가득한 굉장히 특이한 보컬임에는 분명했다. 그런 그녀에게 훗날 기자들이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에게 묻자, 블루스 싱어인 베시 스미스와 루이 암스트롱 외에 별다른 영향을 받은 사람은 없다 라고 말한 것은, 그녀의 특이한 목소리는 다분히 천성적인 것이라는 것의 방증이다.

 

음악적으로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만난 레스터 영과의 상성이 잘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빌리는 그를 향해 "프레지던트 레스터"의 약자인 "Pres"라 부르고, 레스터 영은 그녀를 "Lady day"라 부르며 서로를 존중했다. 실제로 영이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 콰르텟과 함께한 1956년 발매된 음반명은 Pres and Teddy.

 

그녀의 가창력과 정교함은 엘라 피츠제럴드에 비교할 수가 없었으며, 세라 본의 아름답고도 풍부한 음색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대 여성 재즈보컬 가운데 그녀가 최고로 꼽히는 이유는 그녀의 노래에서는 가창력과 음색 같은 것을 떠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면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무언가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블루스에 가장 어울리는 목소리라고도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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