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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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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령 2020. 3. 3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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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7일, 오전 9시40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 도착했다.

 

10시 개장이다. 시간이 남아 바로 앞에 자리한 잔디광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건물을 바라봤다.

 

딱히 감흥은 없지만 지난 2004년까지 연초제조창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개조해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는 있었다. 무엇보다 평일 오전에 이런 호사를 누린다는 건 사회인에겐 꿀 같은

 

시간. 물론 일이라는 부담은 있지만 이 순간을 누려보고 싶었다. 잠시 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5분, 롤

 

렉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일하자.

 

 

 

가장 쉽게 예술을 접해 보니

 

 

 

 

자동문이 열리자 친절한 안내원이 바로 뒤 매표소에 들르라고 일러줬다. 입장료를 내려고 지갑을 꺼내는

 

순간, “무료입장입니다”라는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층(로비 및 수장고, 아트존, 보존

 

처리실), 2층 (관람객 쉼터), 3~5층(수장고 및 기획전시실)으로 구분된다. 매표소에서 티켓을 발급받고 들

 

어서자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마트 트레이더스처럼 수백 개의 미술품이 대형 먹거리 상품처럼 모두

 

의 눈높이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유리 가리개마저 없기에 작가의 혼이 담긴 결과물과 정서적인 교류

 

도 가능해 관람 의욕 역시 뿜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가장 큰 전시장인 1층의 개방 수장고에는 조각, 공예 작품 162점이 전시됐다.

 

한국 근대조각의 길을 개척했다고 알려진 김복진부터 송영수, 김세중에 이르기까지 인물들의 작품. 물론

 

그들이 누군지 모르고 관람해도 무방할 정도로 작품들은 친절하다.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는 개, 반으로

 

쪼개진 불상처럼 개인의 상상력을 자아내는 직관적인 작품들과 누가 봐도 ‘내가 백남준이다’라고 공표하듯

 

텔레비전의 본체를 육회 뜨듯 발라내어 사과 상자 세 개 높이의 박스에 겹겹이 붙인 미술작품은 해운대 백

 

사장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미술관을 나와 1분 정도 걷는데 담벼락이 없는 한 고등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슬쩍 정문으로 올라갔다.

 

축구부로 보이는 학생들이 미래의 손흥민이 되기 위해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순간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02년이 떠올랐다. 한일 월드컵을 마치고 모교를 방문한 골키퍼 이운재 선수

 

를 위해 어느 토요일 오전 땀을 뻘뻘 흘리며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환영식을 준비했던 기억,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오픈카를 타고 등장한 그를 보고 학교가 들썩일 정도로 환호했던 웃픈 사연. 묻어둔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보다 몇 개월 전인 2001년 겨울. 당시 방학을 앞두고 친구와 쉬는 시간에

 

운동장을 걷다가 덩치 큰 한 남자가 운동장에서 홀로 달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마침 축구부 친구가 다가와

 

“저 사람, 차범근 선수 아들인데 얼른 사인을 받는 게 좋아”라며 재촉했다. 그에게 달려가 누가 봐도 거리

 

에서 주은 구겨진 종이와 펜을 건네니 사인은 물론 악수까지 청하며 영하의 온도도 녹일 친절을 베풀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이탈리아와 맞붙던 그날 차두리가 보여줬던 오버헤드킥은 여전히 아쉽다. 예상치

 

못하게 떠오른 기억은 취재 중 쌓인 피로마저 날려준다. 사색은 그만.

 

 

지난 2001년 작고한 운보 김기창 화백이 1984년부터 2001년까지 살았던 운보의 집. 운보 박물관과

 

약 7년간 그가 지은 한옥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우리에겐 한국은행의 요청으로 1만 원권 지폐에 새겨

 

진 세종대왕의 얼굴을 그린 화백으로 유명하다. 그의 실력과 명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 내비게이션의 안내

 

가 끝나며 조수석에서 바라본 운보의 집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흐린 날씨는 언덕을 따라 길게 세

 

워진 큰 기와집을 이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기다란 수많은 소나무가 꼿꼿이 세워져

 

있었다. 장관이다. 언덕 너머 운보미술관으로 향하던 중 주변 관람객이 “아, 여기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

 

였구나!”라며 스마트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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