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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첼리스트 쟈클린느 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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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물령 2020. 3. 25.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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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대학 교수인 아버지와 음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하게 자란 뒤 프레는 세살 때 부터 음악에 재질을 보였고 네살 때 첼로를 선물 받은 후, 다섯살에 조기 교육을 시작한다,

 

특히 유복한 환경으로 인해 당대의 대가인 카잘스,토르틀리에. 로스트로포비치등으로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그것은 그녀의 천부적 재능과 맞물려 가공 할 만한 연주력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녀는 16세에 공식으로 데뷔한 이래, 대륙을 오가며 영국과 미국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다,

 

젊은 여류 첼리스트가 남성적 악기인 커다란 첼로를 몸에 안고, 현을 끊어버리는 강렬한 보잉을 선보였을 때 당

 

대의 비평가들이 내린 그녀의 연주에 대한 평은, "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 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녀는 사람을 "미치게 했다".

 

특히 1919년 작곡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초연이래 별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엘가의 협주곡은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진 초연에서 "오케스트라의 치욕"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쟈크린느 뒤프레의 손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때 많은 영국인들은 엘가와 그녀를 영국 음악계의 영웅이자 자존심으로 취급했다.

 

특히 독일음악의 위세에 눌려, 변변한 음악가를 배출하지 못했던 영국은 엘가의 등장과 그녀의 연주에 뜨겁게 열광했다.

 

그러나 그녀는 23세이던 1967년 유태인이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한다,

 

그녀의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은 이들의 결혼을 그리 반기지 않았다. 바렌보임은 탁

 

월한 연주자이자 지휘자이긴 했지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었고, 슬프게도 주변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그녀는 사랑 역시 정열적이었다.

 

그녀는 바렌보임과 결혼함과 동시에 유대교로 개종하고 이스라엘 수상 벤구리온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 음악적 입지가 취약한 바렌보임으로서는 이스라엘과 영국이라는 강력한 후원 기반이 만들어진 셈이지만,

 

반대로 자클린의 입장에서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음악의 주류세계로 진입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클린은 중동의 6일 전쟁중에 이스라엘로 날아가 이스라엘 교향악단과 협연을 할 정도로 바렌보임에 대한 강한 애정을 과시했다.

 

바렌보임은 60년대의 스타로 등장한 그녀를 자신의 이력에 최대한 활용했다,

 

그녀를 앞세운 엘가의 협주곡의 연주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그녀의 예술혼은 사랑하는 이의 미래를 위해 더욱 정열적으로 불타올랐고,

 

연주장에서 터져버린 첼로의 현을 갈아끼는 일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했다. 그러나 정작 바렌보임은 바그네리언이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무대에 서기를 갈망했고, 결국에는 그꿈을 이룬다,

 

바그너는 철저한 반유태주의자로 히틀러의 우상이었던 인물이다. 바렌보임은 쟈클린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고, 자신은 반 유대주의자의 음악을 숭배하는 커밍 아웃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결혼후 바렌보임은 그녀를 혹독하게 조련한다, 그러나 그녀의 강렬하고 파괴력있던 연주는 결혼후 서서히 시들어 갔다.

 

그녀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보잉과 운지에서 힘이라고는 도저히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리허설에서 피로감에 쓰러지거나, 활을 놓치는 일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시력조차 떨어졌다, 그럴수록 바렌보임은 정신력 문제를 거론하며 그녀를 더욱 혹독하게 몰아 붙였다.

 

바렌보임으로서는 그녀의 연주력이 쇠락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1970년 이래, 그녀의 연주는 점점 최악으로 치달았다.

 

결국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던 비평가들은 이제 더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일관성없고 조리없는 연주는 "정말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유명 정신분석학자를 찾아 심리분석과 심리치료를 받고, 남편인 바렌보임과 주변사람들은 일정을 핑계로 점점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라고 전한다.

 

결국 그녀는 길거리에서 쓰러진다.

 

그때서야 병원에서 제대로 된 검사를 받고 정확한 진단이 내려졌다. Multiple Sclerosis( 다발성 경화증) 이라는 병이었다.

 

이병은 삼십만에 한명이 발병하고, 온몸의 신경 세포를 따라 종양이 발생하는 무서운 병이다.신경세포가 지나가는자리,. 손가락 마디하나하나.

 

척수 신경하나하나, 뇌세포까지 굳어지고 기능을 잃어가면 결국에는 근육이 마비되고 숨을 쉴 수 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불과 30년전 클라라 하스킬이 지나갔던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의 터널로 들어 선 것이다.

그러나 그병을 진단 받았을 때 그녀의 반응은 가슴아프게도 " 그이에게 내 정신력이 약한 탓이 아니었다고 말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라는 것 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고통스러운 투병생활로 들어가지만, 그래도 아픈몸을 이끌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나 병이 점점 심해지면서 그녀는 외출이 불가능 해졌고,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바렌보임을 비롯한 지인들은 연주자로서의 생명이 끝난 그녀를 너무나 쉽게 잊어 버렸다.

 

뒤 프레의 전기 작가 캐롤 이스턴은 읽기도 말하기도 힘들게 된 말년의 뒤 프레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의 협주곡

 

을 틀어놓고 멍하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음악을 들을 때마다 몸이

 

찟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눈물조각 처럼.." 그리곤 고개를 떨구고서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유명한 첼로리스트이자, 바렌보임의 부인으로 젋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클린 드 프레

 

그녀의 병세는 75년부터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다, 척수신경이 침범 당하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면신경의 손상으로 안면근육을 움직이거나,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가슴에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상황에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릴 수없는 운명에 처했던 그녀에게 허락된것은 고작 떠먹여

 

주는 스프를 목으로 흘려 넣거나. 자신이 예전에 녹음했던 음악들이 귀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것 만큼 이었다. 그리고 1987년 그녀는 짧고 열정적이었던 생의 전반기와, 길고 고통스러웠던 후반기를 거쳐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

 

사실 그녀의 음악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그녀가 남긴 디스코그라피는 그녀의 음악이 다시 붐을 일으켰던 1990년대 후반에 EMI 레이블을 통해 소개된 죤 바비롤리 연주의 엘가 첼로 협주곡, 남편이었던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의 엘가 첼로 협주곡, 그리고 하이든과 베토벤의 첼로 협주곡과 막스 부루흐의 콜 니드라이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이중에서 죤 바비롤리 지휘의 엘가 첼로협주곡과 콜 니드라이는 엘가 연주에서 두번 다시 듣기힘든 불후의 명연주로 꼽히고 있다.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가 한순간에 모든것을 잃어버린 여인.. 쟈크린느 뒤프레.. 그녀의 음악은 그렇게 우리들의 곁에 남아있다.

 

한편 그녀의 병중에 뒤프레와 이혼하고 뒤프레 사후 한번도 그녀의 무덤을 찾지 않았던 바렌보임은 뒤프레의 죽음이후 여러나라 평론가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영국에서는 뒤프레를 버렸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선 남미 출신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선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또 유태계 내부에서는 바그너 음악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또 미국에서는 음악가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그는 결국 그의 집념을 성취하고 오늘날에는 훌륭한 바그너 음악의 전문가로서, 혹은 베토벤과 모짜르트

 

소나타의 전문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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